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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백혜선님)

by hills93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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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 (백혜선님)

 


나는 나의 가장 못생긴 발을 꺼내 놓는다.
여기엔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먼저 꺼내지 않는 이야기, 대화 중 언급되면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안달인 이야기, 주변인들조차 영영 몰랐으면 하는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너무나 정제된 이야기들보다 나라는 인간의 내면을 훨씬 더 정확히 표현해주리라 믿는다.

수영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운 사람

몸의 근육이 부드럽게 풀어진 채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느슨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긴장과 집중이 반드시 동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완과 집중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주는 듯했다. 수경을 쓰고 있었지만 오직 물 아래만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영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머릿속에서 지운 사람 같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타트 지점에 서 있는 우리들은 최윤정과 그 밖의 아이들로 나뉘는 듯했다. 나는 이미 우리의 시작점이 다름을 느꼈다.


쌀알만큼 작은 기쁨
건반을 누르니 싱거운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어쩐지 너무 나다워서 한참이나 반복해서 치고 들었다. 싱거운 소리가 나를 다독이는 것 같았다. 피아노가 마치 나의 감정을 소리로 흡수하는 것 같았다. 명랑하면서도 가볍고 조금은 텅 빈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별것 아닌 작은 소리에 이상하게 몸이 흔들렸다. 그것은 쌀알만큼 작은 기쁨이었지만, 어쩌면 나로 하여금 그후 오십 년 가까이를 피아노 앞에 앉아 있도록 만든 기쁨이 아니었을까.

백 번이 아닌 백오십 번을 치는 것
틀리지 않고 백 번을 치는 연습은 그 뒤로도 나의 철칙으로 자리잡았다.

백 번을 치고 나면 정말 옆에서 어떤 방해가 들어와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찾은 답은, 백 번이 아닌 백오십 번을 치는 것이었다.
다만 더해진 오십 번의 연주는 조금 달라야 했다.

처음 백 번은 전과 똑같이 내 손으로 연주하되, 나머지 오십 번은 머릿속으로 연주를 정확히 상상하여 그것을 귀로 듣는 것이다.

만약 상상 속의 연주가 어느 지점에서 막힌다면 여지없이 처음으로 돌아간다. 귀로 듣고 머리로 생각하여 몸 전체가 음악으로 하나 되는 연습이었다.

연주를 많이 하면 굳은살이 박인다는 오해
굳은살이란 오히려 피아노를 한동안 치지 않았다가 오랜만에 쳤을 때야 박이는 것이다.

고로 굳은살이 박였다는 것은 곧 그 연주자가 훈련을 게을리했다는 뜻이 된다.

연주를 많이 하면 굳은살이 박인다는 것은 사람들이 많이들 가진 오해다.

사람은 자기가 언어로 알고 있는 것만큼만 표현하고 생각하게 되어 있다
정확한 단어가 아니라 그냥 그림처럼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 희미한 표현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거야.”

레슨이 끝날 때마다 새로 에세이를 한 편씩 써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그것도 피아노와는 전혀 무관한 듯한 주제들로 말이다.

비가 오면 ‘비’, 눈이 오면 ‘눈’ 하는 식으로 그냥 선생님이 툭 던지는 단어에 대해 쓸 때도 있었고,

미술관에 갔다가 마침 열려 있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전시회를 보고 눈에 들어온 그림을 하나 선택해 그에 대해 쓰기도 했다.

단순한 감상을 쓰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그림이 어떤 점에서 좋았는지 색감은 어떠했고 구도 면에서는 무엇이 눈에 띄었는지를 정확히 적어오라 했다.

인생에는 나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하루가 한 번은 온다.
단 하루는 아닐지라도, 결정적 순간이라고 부르는 때가 인생에 몇 안 되는 횟수로 찾아온다.

운명의 그날은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하고, 나처럼 예고된 채로 오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다.

전자는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맞아야 하는 문제가 있고, 후자는 잠 못 이루고 피가 말리는 며칠을 보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 엿새 동안 독방에서 나 자신을 연습과 연마의 극단으로 몰아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그날이 왔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이제 나는 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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